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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박노주 |
어느 대학에서 귀염을 받던 고양이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나도 우연히 한 두 번 보았는데, 그 고양이는 학생들이 가까이 가면 다리를 하늘로 향하고 버둥거리며 한 바퀴 돈다. 애교를 부리는 것이다.
그러면 학생들은 아주 즐거워하며 가지고 온 먹이를 준다. 그래서 그런지 그 고양이는 살이 피둥피둥 쪘다. 먹이를 주지 않으면 냉정하게 떠나버린다. 못된 것만 배운 것 같다. 어떻게 항상 먹이를 준비하고 다닌단 말인가.
사실 나에게 즐거움을 준 댓가는 치르는 게 맞기는 하다.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하면 그렇다. 그런데 동물에게까지 자본주의에 물들게 한 것은 인간의 책임이다. 그 고양이를 나무랄 처지는 아니다.
그 고양이가 사망한 이유는 혈전에 의한 것이라 한다.
먹이를 너무 많이 준 것이다. 고양이가 쓰러지자 학생들이 병원에 데려가 살리려고 노력한 모양이다.
이러한 사태는 분명 동물 학대로 인한 것이다. 인간은 반려동물이란 품위 있는 이름으로 동물을 본성에 반하여 살도록 하고 있다. 그 고양이는 인간의 유희 희생물이 된 것일 수도 있다.
동물들은 원래 광활한 자연을 누비며 생존을 위해 사냥을 하는 등 사력을 다하여 살아가도록 창조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인간들이 개입하여 먹이를 미끼로 동물을 노예화한 것이 아닌가. 노동을 해야 하는데 무노동으로 살도록 하는 것은 자연의 질서, 더 나아가 신의 창조원리에 반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동물을 사랑한다며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들을 처벌하는 법률까지 제정하였다. 그러나 누가 진정으로 동물을 학대하고 있는 것인가.
반려동물과 애틋한 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인간세계에 너무 깊이 들어와 버린 반려동물의 문제를 이제는 깊이 생각해 볼 때가 된 것 같다.
어쩌면 오히려 인간이 반려동물의 노예가 되어버린 면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자초한 일이다. 반려견 때문에 외출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며 한탄하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여행을 떠난다면서 반려견을 돌봐줄 사람을 구하지 못해 애를 먹는 사람도 있다.
요즈음 길거리에 유모차가 지나가면 그 내부를 유심히 살펴본다. 아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반려견이 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쁘게 옷도 입히고 리본도 달아주고 어떤 경우에는 신발까지 신겼다. 정상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고문일 수도 있다.
최근 언론에서 차를 뒤쫓아 가는 반려견 사진을 보았다. 차 밖으로 버리고 도주하는 주인을 따라가는 모습이다. 처량하다. 문득 학창 시절 교과서에 실린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수필이 떠오른다. 그 수필은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된다.
이렇게 버려지는 반려견의 모습은 극히 예외적인 현상인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상당히 많은 것이 현실이다. 정을 줄 때는 언제고 나이가 들어 모습이 초라해지니 버리는 것인가. 이제는 인간과 반려동물과의 관계를 재설정할 때가 된 것 같다.